다시, 종이

이방인으로서 이 낯선 땅에 홀로 배낭과 화구통을 메고 온 지도 벌써 십여 년이 지났다. 13년 동안 북쪽과 남쪽을 거쳐 이제 중부, 오베르뉴(Auvergne)에 반쯤 정착하게 되었다.

 

이 모든 시작은 어린 시절, 바닥에 배를 딱 붙이고 엄마의 퇴근 시간을 기다리며 그리던 낙서에서 비롯되었다. 나이가 들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머릿속에 뚜렷한 대답은 없었다. « 그럼 예술가가 되어야지 »라는 말은 주로 남들이 대신 해주었고, 나는 그 길을 어설프게나마 따랐지만,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처음에 프랑스로 유학을 가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곳에 어떤 파라다이스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기대도, 판타지도 없었다. 그저 ‘프랑스는 학비가 없다’는 말만 듣고 프랑스 땅을 밟았다. 시간이 흘러 학교를 마치고, 마치 영수증 같은 종이 한 장을 받았다. 그 위에 ‘학위’라는 그럴듯한 단어가 쓰여 있었지만, 처음부터 그것이 쓸모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학위가 쓰여진 종이보다는 내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새로운 문화 속에서 가끔은 충돌하기도 하며 스스로의 세상을 넓혀 나간 것이 나에게 그 어떤 것보다 의미가 있었다. 졸업 후 살아가는 데는 더 혹독한 대가가 필요했던 건 차치하고 말이다.

 

그렇게 그림에서 사진으로, 사진에서 영상으로… 그리고 다시 종이 위로 돌아왔다. 이렇게 돌아올 일이었나 싶을 정도로 나는 그림을 다시 좋아하게 되었다. 다시 나는 그림을 그린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